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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3월 17일 보스턴 농경일지 [인간이 미안해]

게으른보농 2023. 3. 18.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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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미안해 1

 

며칠 전 스노우스톰이 세게 왔다갔다. 눈은 20cm씩 쌓이고 바람도 어찌나 매섭게 불던지, 온 동네 나무가 흔들릴 정도였다. 작년 이맘때쯤 뭘했나 했더니 나는 술을 빚고 있었더라. 낮이 겨울보다 길어져서 봄인가하고 설레서 씨앗을 뿌렸다가 아직 안심하지 말라는 듯 들이닥치는 스노우스톰을 맞으면 이맘때 집 안에서 할 수 있는 게 술빚기 뿐이라서 그런가보다. 

 

그래도 올해는 수경재배기가 실내에 들어와준 덕에 상추나 샐러드채소들 크는 거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텃밭에 나가 이것저것 팍팍 심으면 스트레스는 풀리지만 벌레, 민달팽이, 다람쥐와 토끼들이 우르르 몰려오기 시작하면 다시 스트레스를 주는 대상이 되기도 한다. 수경재배는 해충과 야생동물의 공격을 받을일 없어 마음이 편안하다. 

 

 

 

정확히 말하면 편안할 줄 알았다. 앞으로도 양액만 보충해주면 별탈 없이 편안하게 쌈채를 무한리필해 먹을 수 있을줄 알았다. 우리집에도 야생동물이 있다는 걸 깨닫기 전까지.

 

우리집 고양이들 중에 유난히 내 껌딱지인 녀석이 있다. 내가 이번주 수경재배기에 포트를 꽂았다 뺐다 하며 온 관심을 여기다가 쏟아붓자 그 껌딱지 녀석이 아무래도 심통이 났나 보다. 어제 오후 갑자기 수경재배기 맨 아랫칸에 있는 상추에 목을 빼고 뜯어 드시기 시작했다. 엄마의 관심을 다 앗아간 것에 대한 응징 겸, 심심풀이로 씹어볼(?) 채소 획득 겸 벌인 짓이었다. 유난히 배추류를 좋아하는 녀석인데 왜 나는 수경재배기 위의 채소들이 이 녀석에서 안전하다고 생각했을까? 

 

농경일지를 위해 사진을 찍어야 해서 대응을 늦게 했더니, 상추 잎 하나가 뜯겨나갔다.

 

파이프를 딛고 올라가는 걸 보고 으악!하고 소리를 질렀지만, 그렇다고 욘석을 혼낼 수는 없었다. (너무 귀여우니까) 요즘 내가 식물들에게만 애정을 주고, 너무 이 녀석이랑 놀아주지 않아서 그런가 싶어 오랜만에 캣닢쿠션을 꺼내 격하게 흔들어주었다. 한맺힌 듯 와구와구 하는 걸 보니 안쓰럽네. 인간이 미안해

상추 대신 바친 제물

 

 

인간이 미안해 2

 

봄이 오기만 하면 바로 내다 심을 작정인 모종들도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다. 수경재배기의 grow light이 닿는 아랫공간은 아무래도 발아된지 얼마 안되어 키가 작은 녀석들에게 주어야 하기에, 새싹의 키가 제법 자란 아이들이나 본잎이 나온 호박류들은 전부 창가로 옮겨주었다. 

 

탐스러운 호박잎

 

코코피트로 모종 트레이를 채우기도 했고, 새싹들에게 스트레스가 될까봐 저면관수로만 물을 주는 중인데, 그러다보니 뿌리파리들의 파티장이 되기 딱 좋은 환경이다. 먹을 채소들이기에 moquito bite는 쓸 수 없고, 새싹들에게 약을 칠수도 없어서 과산화수소수 (드루이드묘약) 희석액을 자주 주어 혹시 있을지도 모를 뿌리파리 유충을 퇴치하고 있다. 뿌리파리 성충은 끈끈이를 여기저기 꽂아서 퇴치하고 있는데, 제법 여기저기 많이 붙어있다. 

 

얇은 부추와 대파 새싹들은 뿌리파리의 최애인듯해서 화분마다 2-3개씩 꽂아주었다

 

그런데 끈끈이가 뿌리파리만 잡는 건 아니었다. 햇볕을 골고루 받았으면 좋겠어서 땅바닥에 모종 트레이 몇개를 내려놓았는데, 거기 꽂아놓은 끈끈이가 우리 딸래미 꼬리에 붙어버린 것이다. 장모종이신 우리 공주님께서는 평소 본인 털을 한올한올 무척이나 아끼신다. 어쩌다 뭉쳐버린 털을 조금 잘라주기라도 하면 오만짜증을 다 내시는 편인데.. 

 

이걸 어쩐다

 

꼬리 털을 자르지 않고 끈끈이만 쏙 떼내보려고 살짝 당겼는데 꼬리털이 뽑힐듯이 따라왔다. 공주님의 짜증 수위를 보니 꼬리털 부분이 당겨서 꽤 아팠던 모양이다. 활화산 수준으로 올라오는 딸래미의 화를 잘 달래주고, 눈치를 한참 보다가 얼른 끈끈이 주변 털을 잘라주었다. 

 

 

꼬리털 자른 거 자진납세...



끈끈이는 고양님들 털이 닿지 않는 방향으로 옮겨서 꽂아주어야겠다. 인간이 미안해...

 

 

인간이 미안해 3

 

씨앗들은 파종(씨뿌리기), 정식(옮겨심기)과 수확시기가 정해져있다. 원래는 뚜렷한 4계절의 변화에 맞춰 싹이 트고 꽃이 피고 열매가 달리기 마련인데, 요즘의 식물들은 지구온난화와 이상기온으로 인해 변해버린 기온에 어리둥절하고 있겠지. 

 

이상기온까지 가지 않더라도, 씨앗을 뿌려야 할 시기가 아닐 때 파종하는 인간 때문에 어리둥절할 식물들도 있다. 나로 인해 어리둥절할 식물 1은 봄무이다. 사실 노지에다가 줄 뿌리기로 직파해서 키우면 봄이 지나고 얼마 안되어 수확하는 무 종류인데, 눈이 너무 오니 새싹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싶어 내내 미뤄두었었다. 당근이나 무 같은 뿌리채소들은 옮겨심기를 하면 안되는 작물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뿌리가 모종트레이의 길이를 넘기 전에 살살 옮겨 심는것 정도는 괜찮겠지 싶어 냅다 파종해버렸다. 

 

 

 

2월 말부터 파종해서 더워지기 전에 잘라 먹는 얼갈이배추와 꼬꼬마양배추도 추가로 파종하였다. 실내 화분에서 키워서 좀 여린 잎이라도 수확이 가능해지면 바로 먹어버리려고. 이렇게 어긋난 계절에 파종하는 인간들때문에 씨앗들이 고생이네. 반대로 아욱은 봄 노지에 파종해서 더워지기 전에 먹는 작물인데 좀 일찍 심어버렸다. 여차하면 화분에 심어 잎을 잘라 아욱국 끓여먹고 밖에 옮겨심지 뭐...

 

 

게으른 농부 때문에 늦게 흙을 만나서 고생하는 씨앗도 있다. 인터넷 농부님들을 보니 다들 봄냉이를 드시고 계시기에 나도 냉이 한번 심어볼까했다. 2년정도 묵은 냉이 씨앗이 있는데 언제 어떻게 심을지 몰라 우선순위에서 매번 밀리고 있었거든. 남편에게 '혹시 냉이 좋아해?'하고 물으니 좋아한단다. 없는걸 내놓으라고 하는 편이 아닌 성격이라 좋지만, 냉이를 좋아하면 농사 짓는 사람 옆에서 넌지시 냉이도 심어달라하지, 물어볼때까지 아무 말도 안하다니. 

 

냉이씨앗 패킷 뒷면에는 4월 파종 또는 9월 파종이라는데, 구글링을 해보니 봄이 오기 아주전에 파종해야한단다. 고온기가 되면 씨앗이 잘 나지 않고, 꽃대가 빨리 올라와버려(추대) 맛과 향이 옅어진다나. 공기 난방을 해대는 미국 집의 실내는 냉이가 느끼기에 고온기가 온 것과 다르지 않을 것 같아, 모종트레이에 씨앗을 뿌리고 창문 바깥 창틀에 걸쳐놓았다. 이렇게 냉이 씨앗을 얄팍하게 속여서라도 고온기 전에 냉이나물로 봄내음 한번 맡아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냉이에게도 인간이 미안해!

 

늦겨울이라 착각해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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