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보스턴 게으른 농경일지

토종 제주 구억배추 씨앗부터 키우기 (자가채종 목적의 3월 파종 프로젝트: 추대는 성공, 채종은 실패)

게으른보농 2023. 4. 9.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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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드닝 시작한 직후에는 재래종(heirloom)이 무엇인지, F1 종자가 무엇인지 알지도 못했고, 직접 씨앗을 채종해서 보관해야겠다는 생각은 못했었다. 그저 좋아하는 채소류만 골라 수확하는데에만 집중했었지…

그러다 점차 가드닝 연차(?)가 쌓여가고, 희귀한 것들을 찾아 키우는 재미에 빠져들다보니, 한국 토종 채소들을 구해다 키워보고 싶어졌다. 더욱이 내가 한국씨앗 수급이 안정적이지 못한 곳에 산다는 걸 깨달은 후로는 키우기 쉬운 F1 종자보다는 매해 씨앗을 새로 구매하지 않아도 되는 재래종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런 면에서 제주도 구억리 한 할머님께서 보존해왔다는 한국 토종배추 구억배추는 나에게 매력적일수 밖에 없었다. 구억배추, 왕실배추 정도가 토종종자로 유명한 듯한데, 왕실배추는 아직 시중에 씨앗이 판매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구억배추도 사실 한국 종묘상을 통해 구하긴 어려운데, 다행히 kseedz에서 수입 판매하고 있어 난데없이 미국에 사는 내가 이 씨앗을 구할 수 있었다.

 


여느 김장배추와 같이 8월말쯤 파종하는 것이 보통인듯한데, 채종하려면 봄배추처럼 일찍 심어 여름을 지나게 해서 추대되길 기다려야한다고 한다.

 

 


채종을 목적으로 심을 15개 정도만 먼저 파종해보았다.

 


4월 8일
역시 배추나 무는 심는 보람이 있다. 심으면 심는대로 다 나오고 새싹도 빨리 올라온다.


날씨가 흐렸다 개었다해서 창가에 두어도 웃자랄것 같아 아예 수경재배기 grow light 아래 통째로 넣어놨다. 본잎이 뿅뿅 나오면 좀 깊은 화분으로 옮겨주었다가, 5월쯤 한랭사를 치고 바깥에 심어주어야겠다.

 

 


4월 11일
잠깐 관심을 주지 못한 사이 새싹들이 leggy해졌다.
부쩍 바깥날씨가 따스해졌겠다, 얼갈이 배추도 밖에서 잘 자라는거 봤겠다 냉큼 구억배추 새싹들을 바깥 화분에 옮겨심어주었다.

옮기다가 두개 날려먹은건 비밀


4월 18일
역시 비맞고 햇빛쬐는게 채소에 제일 좋다! 대충 옮겨심었는데도 일주일만에 생기가 돋는다.

 


5월 19일
일교차가 무지 큰 나날들이 지속되어서 배추가 매우 파릇파릇하게 잘 자란다. 밤이 추워 그런지 청벌레라던가 민달팽이라던가 하는 애들이 아직 설치지를 못해서 천적도 없는 상황이다. 여행 가기전 배추를 비닐하우스 안으로 넣어줘야할지 말지 무척 고민했는데 그냥 두고 가도 될 것 같다.

아이고 예뻐라

 


6월 8일
바깥에 두고 가도 된다고 생각했던 나를 매우 쳐라. 참으로 안일한 생각이었다. 토끼인지 다람쥐인지 민달팽이인지 라쿤인지 오포썸인지 모르겠지만 이 시부럴것이 귀한 구억배추를 몽땅 씹어 발겨 놓았다.

진짜 양아치니..?

 


발을 디딜 수 있는 곳에 있는 화분만 저렇게 뼈만 남은걸 보니 우리집 마당에 사는 토끼자식인가보다. 토끼가 발을 디디기 어려운 안쪽 화분은 살아남긴 했다.

잎이 좀 뜯겼지만 안쪽 잎들은 무사한 배추 5개 화분을 모아 비닐하우스 안으로 넣어주었다. 빗물은 못 맞추더라도 살기는 해야하는 거 아니겠는가.

 


6월 25일


파종 3개월만에 구억배추 꽃대가 올라오고 있다.
보통 배추의 씨앗을 받으려면 8월 파종-김장철 수확 후 장다리(배추 밑둥을 자른것)를 다시 심고, 월동을 시켜 이듬해 봄에 올라오는 꽃대가 꼬투리를 맺기를 기다려야한다. 그러다보니 ‘월동하지 않은 배추는 꽃대가 올라오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기도 하다.

그런데 어느날, 어느 귀농 카페 댓글에서 ‘3월에 파종한 구억배추는 여름이 되면 채종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주워들었다. 귀하디 귀한 토종배추님이시니, 씨앗 보존용으로라도 채종할 수 있으면 좋겠다 싶어 나도 3월 파종을 해보았다. 그 댓글쓴 분은 사진을 포함한 게시글을 올리거나 한 것은 아니고 그냥 한마디 하신거라, 실제로 꽃대가 올라올지는 반신반의하던 차였다. 그런데 이 구억배추 씨앗을 구매한 곳인 Kseedz 사장님이 ’월동 안해도 배추는 더우면 꽃대가 다 올라오게 되어있다‘고 하시는 게 아닌가! 덕분에 희망을 품고 기다릴 수 있었다네~

여담인데 사실 자가채종을 하겠다는 소비자를 어떤 판매자가 좋아할까? 몬산토 같은 큰 기업들이 왜 늘 채종이 불가능한 종자를 개발하려 하겠는가. 그래서 사실 구억배추 자가채종을 하려한다고 말하는게 좀 민망하고 죄송스러웠는데 정작 사장님 너무 쿨하게 꽃대 올라올거라 말씀하시고 신경도 안 쓰셨다는거…!!! 이 세상 쿨함이 아니다.. (+물론 이걸 나눔하거나 판매하거나 뭐 이렇게 하진 절대 않을거랍니다)

꽃대 안올라온 애들과 꽃대 올라온 애 비교


되게 재미난 점은 꽃대가 올라오기 시작하니 무서운 속도로 자란다. 처음에 중간부분에 몽글몽글한게 생겨서 벌레인가 하고 총진싹을 뿌려줬는데 그게 알고보니 꽃몽우리였고, 2-3일만에 거대한 꽃대로 자라났다.

위엄쩔어
꽃대 하나에 여러 꽃이 달릴 예정인가보다
네 꽃도 노랑색이니? 유채꽃같은 비주얼을 기대해본다


7월 5일
꽃개가 올라오기 시작하니 무서운 속도로 큰다. 벌써 내 어깨만큼 자랐다.



7월 11일
배추 씨앗은 완두콩처럼 생긴 꼬투리 안에 작고 동그란 씨가 쫑쫑 생기는 모양이다. 정작 꽃 모양은 작디 작아서 꽃에서 꼬투리까지 어떻게 변하는지가 궁금했다. 자세히 살펴보니 끄트머리의 꽃이 수정되고 지면 꽃잎이 떨어지고 중앙에 있던 암술수술? 부분이 나와 꼬투리가 맺히는 듯하다.

배추꽃
수정된 꽃은 꽃잎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꽃잎이 떨어져 꼬투리가 맺히기 시작한 곳
아래에서부터 꼬투리가 생기고 위쪽은 계속 새로운 꽃이 핀다

 


일단 꽃대가 올라올지 말지 몰랐고, 채종 성공률을 점칠 수 없어 여러 포기를 키우기 시작했었다. 중간에 토끼 다람쥐 달팽이등의 공격으로 4포기 정도가 남았고, 이젠 청벌레의 공격을 받고 있다. 현재 한 포기에서 성공적으로 꽃대가 올라왔고 꼬투리가 맺히고 있다. 남은 포기 중에서 두개정도는 뒤늦게 꽃대가 맺히기 시작했고, 나머지 한포기는 꽃대가 맺힐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뒤늦게 꽃대를 올리는 포기



8월 8일

씨앗이 맺히기 시작하고 나서는 별다른 관심을 주지 않고 있었다. 씨앗 꼬투리가 전부 배춧대에 달린채로 익어야 채종할 수 있다기에 잠자코 기다린 것인데, 씨앗이 익을만하면 꼬투리가 벌어져있고 근처 작은 잎들도 다 사라진채 줄기만 앙상하게 남는게 아닌가.

첫번째로 의심한건 달팽이였다. 그런데 달팽이가 타고 오르기엔 장다리 줄기가 그리 굵고 튼튼하지 않았다. 달팽이약도 쳐보고 달팽이가 기어오르지 못하는 곳으로 화분도 옮겨보았지만 소용 없었다.

결국 배추화분 중 가장 뒤늦게 꽃대를 올린 하나를 골라 실내로 들여왔다.

 


해가 잘 드는 곳에 두고 관찰을 시작했다. 만 하루도 지나기 전인 그날 밤 범인들이 튀어나왔다.

아니 뭐 이렇게 크냐고


아마도 나방 애벌레인것 같은데 저 녀석이 가장 큰 놈이었고 쟤보다 작은 애벌레가 20마리도 넘게 가장 꼭대기까지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핀셋을 들고 하나씩 떼어내주었는데, 어찌나 잘 먹었던지 다들 통통하기까지 했다.

네놈들이었구나.. 잎만 먹어치울 줄 알았더니 씨앗까지 해치우다니…

저 날 이후로도 약 일주일간 숨어있었는지 알에서 새로 부화했는지 모를 애벌레들을 줄기차게 잡아떼었다. 나중에는 배추흰나비 애벌레까지 나오더라..; (주로 청벌레라고 불리는 그것)

 


8월 26일
벌레들을 다 떼어낸 배추 화분은 안정을 되찾았다. 종종 양액이 섞인 물을 주고, 또 벌레가 생기진 않는지 계속 째려보는 중… 가끔 꽃대를 흔들어주고 손으로 쓸어주며 수정을 시켜주고, 무난히 씨앗이 열리기만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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